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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신세계] 멋진신세계를 통해 나를 마주하기

너구ri 2022. 10. 20.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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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각자의 좋은 세상을 어릴 적부터 꿈꾼다.
나는 망상 혹은 공상을 좋아해서 어른이 되었을 때의 나를 종종 생각하곤 하였다.
내가 어른이 되면 이런집에 살까, 저런 집에 살까, 직업은 무엇일까 결혼은 했을까 등등.
그리고 사회라는 것이 내 머릿속에 정확하게 인식되기 전엔 나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하곤 했다.
그러다가 어찌저찌 대학교를 나오고 사회에 나오게 되었을 땐, 내가 생각하는 사회가 아니어서 절망하기도 하고 그 속에서 대안을 찾기도 하는 것 같다.
나는 한국 오기 전의 내 머릿속의 독일을 꿈꿨었다.
유토피아는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지금의 독일보단 내가 꿈꿨던 독일이 조금 더 유토피아적이라고 할 수 있었을 거 같다.
멋진 신세계.
제목만 봤을 땐 어렸을 땐 청소년이 읽어야 할 고전 도서 목록을 보고 뭐 로봇이라도 나오나 보지?라는 어렴풋한 SF 장르였을 것 같고, 어른이 된 지금은 멋진 신세계란 없고 그러니 당연히 반어법이겠지 하고 능숙하게 작가의 의도를 추측했다.
SNS에서 고전소설로 들어가야 한다면 어떤 곳을 선택하겠느냐 라는 질문에 멋진 신세계를 택한 이들도 많았다.
소설을 다 읽고 나니 나라면 멋진 신세계로 들어가느니 극단적으로 그냥 죽음을 택할 것 같았다.

소설을 읽는 동안 다섯 명 정도의 주요 등장인물이 나온다. 버나드, 무스타파, 헬름홀츠, 레니나 그리고 존.
존을 제외한 나머지 넷은 멋진 신세계에서 살아온 이들이다.
멋진 신세계는 좋은 건 다 때려 박았다. 불평 없는 백인으로 이루어진 계급사회, 늙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죽는 삶. 소마에 의존하여 근심 걱정 불안 없는 삶, 모두가 모두를 소유하는 폴리아모리. 가족관계가 구성되지 않기에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으며 출산의 고통도 없다. 모두 인공 수정된 난자에서 자란다.

다만 이것을 위해 (소설엔 정확하게 쓰여있진 않지만) 고통, 슬픔, 의구심, 질문하기, 사랑 등과 같은 지극히 평범한 감정들을 없엔다. 멋진 신세계 옆에는 야만인 동네도 나오는데 이것은 마치 중세시대 유럽을 떠올리게 한다. 도구를 이용하고 신은 하나님을 숭배하는 사회가 이것이다.

여기서 존이 자라게 되는데 존은 실수로 멋진 신세계 구성원이 임신을 하게 되어 야만인의 사회로 갔다가 거기서 미아가 되어 부득이하게 존을 낳고 존은 그 사회에서 조차 배척되어 사라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의 어머니가 신세계에서 온 거라서 폴리아모리 짓을 했다가 거의 화냥년으로 몰리고 그의 아들조차 더럽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존은 엄청난 것을 꿈꾸며 이 신세계로 들어오지만 신세계 사람들에게 그는 그저 하나의 동물원의 코끼리 같은 존재일 뿐이다. 이 존을 신세계로 들여온 게 버나드와 레니나이고 레니나는 존을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버나드는 안타깝게도 뒤떨어지는 외모로 이 세계 속에서 배척을 받다 존으로 인해 주목과 명성을 얻으며 짧게 올라갔다 추락하고 만다. 그리고 버나드의 친구 헬름홀츠는 그나마 가장 인간다운 인물인데 결국엔 이 신세계에 적응을 못하고 버나드와 같이 추방되어 버린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 같았다 혹은 우리로 하여금 질문을 하게끔 만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세계에선 소마라는 약물로 인해서 하루의 걱정 근심거리 불안을 사라지게 만드는데, 알다시피 현대사회의 여러 병의 주범은 스트레스이고 이 스트레스는 걱정과 근심 그리고 불안에서 나온다. 소마로 이 것 모두가 사라지게 하는 게 과연 좋은 걸까?
신세계에서는 죽음을 굉장히 자연스럽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해서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 사실 부모를 없앤 것도 부모의 죽음을 통해 슬픔을 느끼지 않게 하려는 것이 아녔을까. 하지만 우리가 슬픔을 느끼지 않는 게 정말 좋은 걸까?
신세계에는 정말 첨단의 사회이지만 그 첨단과학의 이론을 아는 자들은 별로 많지 않다. 과학을 통제하고 생각을 통제한다. 의심이 들지 않게 한다. 의심 없는 사회가 정말 좋은 것일까.
누구를 서로 소유함으로써 얻는 감정은 사랑뿐만 아니라 질투, 원망, 슬픔 등이 있다. 이런 부정적인 감정을 없애기 위해 이 폴리아모리 시스템을 적용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감정이 정말 불필요한 것일까
이런 질문들을 던지면서 나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데 바로 인간다운 게 하나도 없네? 였다.
피상적이고 껍데기로써 사회의 일원인 동시에 부품으로써 존재하는 삶.
사회는 잘 돌아갈 수 있지만 그것이 개인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결국 질문은 또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 걸까라는 내 근본적인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사회는 잘 돌아간다면 그건 좋은 일 아닌가 하지만 난 왜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렇다면 나에겐 개인의 삶이 정말 중요한 건데 그렇다면 나는 무슨 지향점을 원하는 것일까.

사실 나는 현재에서 소설 속의 상태, 즉 불안하지 않고 슬프지 않으며 걱정 근심을 많이 하지 않는 그런 상태가 되고 싶어서 법륜스님의 팟캐도 듣고 화가 나고 속이 상할 때마다 마음을 다스리려고 노력한다. 여기는 소마 한알이면 되는데 나는 왜 그렇게는 하고 싶지 않은 걸까.

결국엔 나에겐 결론보다는 그것에 도달하는 과정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닐까 라는 지점에 이르게 되었다.
결론이 비록 미완성이고 가끔 실패하고 어쩔 땐 반만 성공한다 하더라도, 내가 그 과정 속에서 좌절, 분노, 슬픔, 그러다가 행복을 느끼게 되면, 그리고 이 과정을 수천번 수만 번 반복하며 내 감정을 다스리게 되고 그 다스림속에 평화가 오게 되는 게 나에게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존처럼 이미 나에게도 수만 가지의 사소하고 자잘한 인간다움이 생겨버렸기 때문에
존처럼 그 세계에서 살아야만 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것 같다.
껍데기로 사는 건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

책에 나온 무스타파가 존에게 한말을 인용하자면
"비참한 불행에 대한 과잉 보상에 비하면 현실적인 행복은 상당히 추악해 보입니다. 그리고 물론 안정이란 불안정만큼 그렇게 요란하지는 않습니다. 만족한 상태는 불우한 환경에 대한 멋진 투쟁의 찬란함도 없고, 유혹에 대한 저항 그리고 격정이나 회의가 소용돌이치는 숙명적인 패배의 화려함도 전혀 없습니다. 행복이란 전혀 웅장하지 못하니까요."


어릴 때 읽었다면 어렵고 지루하고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 읽다가 때려치웠을 거 같은데 지금은 읽으면서 풍요롭고 읽고 나서도 며칠 동안 여운이 지속되었다.
너무 좋은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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